
클로드 모네, 베퇴유의 예술가 정원(1881, 유화)
미래의 집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누가 그렇게 물으면 입술을 열 수 있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의 나는 계단이 있는 집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나의 방은 이층에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나에게 ‘과거’는 자주색의 이미지이고, ‘미래’는 빛의 이미지다. 그래서 미래의 집은 ‘빛의 집’ ‘빛의 공간’이다. 그 집은 아른거리고도 희미하지만 반짝인다. 밝고 환한 빛이 멀리서 다가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쩐지 미래는 그런 것 같다. 미래를 짓는 건축자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소망 같은 관념일 것 같다. 나는 행복해질 것이고, 나는 꿈을 이룰 것이고, 나는 이층집에 살 것이고, 나는 지금처럼 밝은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미래를 생각했다.
위의 그림은 클로드 모네의 ‘베퇴유의 예술가 정원’이다.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이다. 실제로 꼭 보고 싶은 그림이기도 하다. 푸른색, 보라색, 초록색, 금색, 분홍색의 그늘은 무척 반짝일 것 같다. ‘평화’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림 속의 계절은 뜨거운 한여름인 듯하다. 해바라기로 보이는 높은 꽃들과 계단 아래는 네 개의 화분에 붉은 꽃이 심겨 있다. 나는 한여름의 쨍쨍한 빛을 좋아한다. 새파란 하늘과 선명한 초록을 좋아한다. 파랑과 초록을 중심으로 색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빛의 화가인 만큼 모네는 빛의 수많은 가능성과 빛의 세밀한 결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모네는 사는 곳이 어디든 정원을 꾸밀 만큼 풍경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그만큼 빛의 변화를 섬세하고 계획적으로 배치하고 느끼는 화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쨍한 빛으로 지워지는 조각들을 종종 본다. 빛 속에 있으면 몽땅 지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태양을 온전히 쳐다볼 수 없는 것처럼 빛의 세계에는 어떤 결계가 있는 것만 같다.
얼마 전 ‘빛과 위생’이라는 시를 쓴 적이 있었다. 빛 속에 있으면 지워짐과 더불어 깨끗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빛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어떤 반짝임보다는 온통 백색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래서 미래도 색깔로 표현하면 하얀색의 이미지다.
모네는 집과 정원의 모습을 다채롭게 그려냈다고 하면, 나는 잔디밭 위에 하얀 집이 있는 모습을 그릴 것 같다. 최대한 고요한 집처럼 보이도록 묘사를 하지 않을까 싶다.
빛과 미래의 이미지는 어떻게 보면 고요함이나 평온함과 연결되는 것 같다. ‘베퇴유의 예술가 정원’에서는 평화의 모습이 화려함과 다채로움이었다면 나의 머릿속에서 평화는 새하얀 빛과 미래의 이미지일 것 같다.
‘베퇴유의 예술가 정원’을 볼 때마다 따뜻함, 아늑함, 그리고 여름의 반짝임을 느낀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오기 전까지는 반짝임으로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미래는 오고 또 와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계속 반짝임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빛과 미래는 희미하기에 좋은 것 같다. 오래도록 ‘빛의 집’ ‘미래의 집’에서 아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