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은 제 얼굴을 만질 수 없다. (...) 돌은 으스러져도 제 피를 볼 수 없다.
(이성복, 「돌에 대하여」 부분,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사, 2013)
어떤 곳에 가면 돌을 줍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을 좋아한다.
돌이 있는 곳에서는 예쁜 돌을 찾는다. ‘예쁘다’의 기준은 어떤 형태나 모양, 윤곽에 가깝다기보다는 빛깔이나 질감, 혹은 단순한 감각에 가까운 듯하다.
그런 돌을 왜 주워?
누가 그리 물으면 말없이 주머니에 넣을 것이다.
기념이 되거나 의미가 되는 물건을 좋아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돌인 듯하다.
돌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정하고 난 오후에 친구는 문득 “제주도에서 돌 가져오는 거 불법인 거 알아?” 그렇게 말하였다. “응, 알아. 그런데 나는 제주도에서 가는 곳마다 돌 주웠어.” 나는 대답했다.
어쩌면 돌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돌은 돌이다. 그런데 다른 곳의 돌이 아니라 ‘그곳’의 돌이라 말하면 의미가 생기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너무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때때로 돌을 보며 그곳을 떠올리고는 한다.
어쩐지 돌을 보면 신비하다. 별것 아닌 것인데. 모이면 무겁기만 한 것인데.
그럼에도 돌에 대해 생각할 때면 고요해진다.
돌은 고요하고 돌은 말이 없으며 돌은 고독한 존재이다.
돌을 모으기 좋아하는 버릇은 아마 어릴 적부터였다. 산이나 바다에 갈 때면 돌을 주워오고는 했고 자갈이나 조개를 줍기도 했다.
돌에 그림을 그린 적도 있었는데
단단해져 간다는 것. 무늬가 된다는 것.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특별해진다.
엄마는 한동안 수석을 모았다. 나는 돌을 줍는 일은 좋아하나 집중적으로 돌을 모으는 일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무늬와 크기와 생김새에 따라 값이 매겨지는 것. 그런 귀한 돌을 모으는 것.
엄마는 돌을 가리키며 ‘이것은 매화 무늬이며’ ‘이것은 달과 강이며’ ‘이것은 사람 얼굴로 보이며’ 하면서 내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나에게 돌은 돌이다.
돌일 뿐이다.
그렇게 깊이 있게 모으거나 다루는 것이 아니다.
돌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특별히 여기기보다 하나의 돌로 존재한다.
돌은 돌 자체다.
어항에 넣은 돌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산에서 주운 돌과 강에서 주운 돌과 바다에서 주운 돌이 모이면 하나의 세계가 된다. 작은 어항이지만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다.
물렁물렁한 돌에 대해 생각한다.
미세한 모래가 되어간다.
돌의 단단함이 되어간다.
물 위를 걷는 마음
우리의 발자국은 멀리 뻗어나갔다
강물 속에 있는 돌은
우리가 던져 생긴 것이어서
쌓이고 쌓여서 불어난
뜨지 않는 부력이어서
우리들은 번지는 파문을 가졌다
흔적을 남기고 나아가는 마음에 대해서
모난 돌과 매끄러운 돌 모두
물속에선 가라앉았다
돌이 슬픔이라도 되는 듯
아이들은 멀리 보내고 싶어 하고
어린 너에게 무슨 슬픔이 있을까 생각하니
너의 얼굴이 물결처럼 잔잔해졌다
돌의 무늬는
물결이 새긴 것이었다
돌을 따라 너의 시선이 함께
번져 나아갔다
돌이 물에 부딪칠 때마다
강물은 기침했다
잠든 눈망울이 깨어나고
튀어 올랐던 물방울이 다시 잠잠해진다
던지고 던져도 강변의 돌은
줄지 않는 것 같았다
더 가라앉을 마음이 많았다
돌이 주저앉고
물오리가 꽥 하고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