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막아도 너의 말이 들려. 꿀꿀. 꽥꽥. 낯선 언어를 배울 때는 동물이 되는 것일까. 꽥꽥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꿀꿀꿀 하품을 하면서 // 언어가 사라진다면 나는 어떤 꿈속에 남게 될까.

(이기성, 「대화」 부분, 『사라진 재의 아이』, 현대문학, 2018)

동물이 되는 상상을 자주 했다. 전생과 환생에 대하여 크게 믿는 편은 아니지만 때때로 동물로 태어나고 싶다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작은 동물이 되어보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 무슨 동물이 될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는데 다람쥐와 같은 작은 동물이었다. 작은 동물이 되어서 커다란 세계를 느끼고 싶었다. 그때 쓴 글을 조금 가져오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거대해질 것이다// 나는 포식자가 될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를 가질 것이다’ ‘그곳에 오르기가 버거워서 제자리뛰기 한다 뛰다 보면 언젠가 높아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나뭇가지 사이마다 집을 지은 거미를 먹을 수 있을 텐데 참으로 싱싱할 텐데’

동물이 되는 상상을 해보면 이상하게도 시각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무엇을 먹게 될지. 그것의 맛은 어떠할지. 그 동물이 듣는 소리는 인간과 같을지. 몸을 움직이는 방식에는 불편함이 없는지. 잠을 자는 일과 추위를 견디는 일은 어떤 방식일지. 시각적인 부분에서도 어떤 색깔과 어떤 윤곽으로 보일지.

너무나 상상할 거리가 많음에도 시각에만 집중하게 되는 듯하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표정을 알아보는 동물 앞에서는 주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동물에게도 어떤 영혼이 있을 것만 같다.

한 과학 서적을 보다가 동물에게 존재하는 감정에 대한 부분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영혼은 감정보다 몇 단계 더 나아가는 범위인 듯해서 가늠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동물의 세계는 알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신비스러운 기분이 든다.

어떤 전생이나 환생에 대해 생각하면서 모든 생명이 각각의 운명을 가졌을지에 대한 의문도 든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의 소, 양, 돼지, 닭 혹은 작은 벌레까지 무수한 생명에게 전생이나 환생이 있다고 생각해보면 아득해진다.

누군가 말한 적이 있었다. 동물이 되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그 말을 듣고 나서 든 생각은 동물의 세계도 인간의 세계만큼 벅찬 지점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때때로 동물을 보면서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왜 지금 이때 인간은 살아가고 있으며, 동물들은 왜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지에 대한 의문 때문인 듯하다. 인간은 왜 존재하는지에 관한 질문만큼이나 동물들은 왜 존재하는지에 관한 질문도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보다 큰 동물이 되는 상상을 해본다. 혹은 날아다니거나 바닷속에 살아가는 동물이 되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면 생각의 범위가 넓어진다.

동물의 목소리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동물이 되면 각각의 울음과 대화법을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의 세계의 방식을 이해해나갈 것이다.

어릴 적에는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무엇이냐고 누가 물으면 쉽게 대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런 듯하다. 누군가 물으면 명치 안쪽에서 생명체가 움직이는 듯하다. 그것으로 태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