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20 ♥♡♡

무성한 초록이 있는(월) 맑고 징그러운(일) 타로를 보고 싶은(요일)

날씨 : ☂

‘9와 숫자들’의 노래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가사를 좋아한다. 리듬이나 멜로디가 아니라 가사가 좋다는 생각을 그들의 곡을 통해 처음 했다. 그해에 처음 듣는 노래가 일 년의 운명을 결정 짓는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평정심’이라는 곡을 해가 바뀌던 자정에 들었다. 스무 살의 날들이 평안하고 고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밝고 경쾌한 노래가 아니어서 오히려 담담하고 단단한 마음으로 올해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스무 살의 날들을 보내면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노래를 반복 재생하듯 고요함으로 되돌아가는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다.

산책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빛을 받으면서 걸으면 정리되는 기분을 받는다. 쏟아지는 햇살 사이로 생각이라는 무늬들이 끼어드는 것 같다. 나는 같은 자리를 오고 가는 일을 좋아한다. 특히 공원 끝에서부터 끝을 오가는 일을 좋아하는데 그러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같은 자리에서 다른 장면들을 포착한다. 나는 걸으면서 꽃의 이름을 외우는 일을 좋아한다. 하루는 벚꽃과 매화의 차이에 대해 궁금해진 적이 있었다. 얼핏 봐서는 비슷해 보이는데 피는 시기와 꽃술 부분이 조금 다르다고 한다.

어릴 적 하천을 따라 함께 하교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때는 같이 있으면 좋고 즐겁던 마음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모두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것이 종종 울적해지기도 하지만 해마다 보이는 꽃들처럼 가끔이라도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좋다. 나는 전화를 받는 일을 부담스러워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막상 전화를 받고 나면 이상한 편안함을 느낀다. 평정심을 되찾아간다. 올해 썼던 일기를 보면 걱정과 불안과 겁을 먹었던 일을 마주하면서 평정심을 되찾아가는 순간이 많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주저함과 편안함이 카세트테이프처럼 계속해서 순환되고 있는 것 같다.

조금 선선한(월) 하늘을 보고 싶은(일) 내가 태어난(요일)

날씨 : ☀

엄마는 나를 마흔에 제왕절개로 낳았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 아기인 나를 품에 안고 조용히 월드컵을 응원했다고 하셨다.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냐고 물으면 작은 나를 품에 안았던 순간이 생생하다고 엄마는 말한다. 엄마는 노산이었던 탓에 나를 낳고 많이 아팠다. 그래서 의사는 엄마에게 수술을 권하기도 했다. 어릴 때는 엄마가 아픈 것이 나 때문이라고 여겼다. 무엇이든 혼자 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처음부터 내성적인 생명체로 태어난 것 같다. 엄마는 내가 조용하고, 혼자 놀고 잠들기 좋아하는 아기였다고 했다. 처음부터 혼자임을 좋아하던 아이가 혼자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까지 했기에 지금의 내가 된 것 같다.

어릴 때의 나는 혼자가 되는 상상을 자주 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엄마 아빠를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별이라고 하는 거대한 그늘 같은 것이 일찍 나를 덮어버릴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이런 상상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스무 살이 된 지금도 혼자가 되는 상상을 자주 한다. 어릴 때의 나는 엄마 아빠의 나이가 많은 것을 무척 싫어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엄마의 나이가 젊은 것이 일종의 자랑 같은 것이었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래서 누가 내게 엄마 아빠의 나이를 물으면 가슴에 무언가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이를 속여서 대답한 적도 많았다.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다. 씩씩해지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겁 많은 아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겁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겁은 의미의 크기에 비해 귀여운 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느낀다. 겁, 하고 발음하면 입술이 닫히고 소리가 입속에 갇히는 느낌이 좋다. 겁을 내면 후에 별것 아님을 느끼게 되어서 나는 겁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나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혼자가 되는 것이다. 혼자에 익숙해졌다고 방심할 때마다 겁은 다가왔던 것 같다. 느린 걸음이 아니라 순간이동처럼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나인 순간도 혼자일 때다. 시를 공부하고 시를 쓰면서 나를 많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시를 통해 많이 위로받고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문장들은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많이 숨기고 있다. 나는 심보선 시인의 시 중 ‘형’이라는 시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도 형은 시인은 안 됐을 거야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고 쓰는 게 시니까 말야 이것 봐, 지금 나는 형을 떠올리며 시를 쓰고 있잖아’라는 구절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시들을 떠올리면 표현이 솔직하고 의미가 직설적인 시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시를 쓰면서 솔직해지고 싶은 욕심이 끊임없이 들었는데 여전히 나를 많이 숨긴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어딘가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기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나도 그렇다. 그래서 ‘형’이라는 시 속 문장이 더욱 와닿는다. 나는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이 되고 싶은데 시를 쓸 때마다 자꾸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 아이였고 어른이 되었다.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나의 속을 들켜버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아직도 그런 마음이 있어서 나의 이야기를 잘 꺼내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글로 나의 마음을 숨기려 한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만, 이야기를 잘 꺼내지는 못하는 스무 살이 되어버려서 이제는 나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졸음이 쏟아지는(월) 없는 동생이 자는 척하는(일) 하품하면서 눈물이 흐른(요일)

날씨 : ☁

엄마 아빠가 맞벌이하셨던 탓에 어릴 적 나는 방과 후에 늘 혼자였다. 그러면 도서관에 가거나 집에 돌아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도서관에 가면 친구들은 푹신푹신한 소파가 있는 만화책 책장 근처에서 바글거렸지만 나는 다른 곳에서 서성거렸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의 나는 끈기가 없어서 책 한 권을 읽어내는 일이 버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고학년이 될 때까지도 동화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아니면 공예, 미술, 시집, 여행 관련 책들을 자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문학소년’이었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조용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문학’과 ‘조용함’이 나를 대변하는 말은 아니어서 종종 나 아님을 느끼기도 한다. 가끔 목소리를 조금만 크게 내거나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하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볼 때가 많다. 친구는 ‘나다운 것’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사람들은 내 새로운 모습에 어색함을 느껴서 그런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렇지만 ‘나다운 것’이라는 어떤 경계에서 벗어날 때마다 겁이 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문학’과 ‘조용함’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안정적인 느낌을 받기도 한다. 마치 좁은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 양이 된 것만 같다.

스무 살이 되고 나서 정한 목표 중의 하나가 나를 찾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아서 스스로 정한 목표이다. 방학 동안 목록을 적어보았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나는 초록, 하늘, 보라색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연하고 투명한 느낌이 나는 결의 색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또한 내가 자전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는 것도 생각해냈다. 어릴 때는 친구들과 자전거를 매일 탔는데 커서는 탄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돈을 모아 몇 달 전에 자전거를 샀다. 비싼 자전거는 아니었지만 어른이 되고 나의 자전거를 나의 힘으로 가지게 된 것이라 무척 기뻤다. 매일 천변을 달리면서 성장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지나치게 눈 부신 빛들을 좋아한다. 새벽의 감성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한낮의 감성으로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광이 나지 않는 물건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물건들을 좋아한다. 유리컵과 썬캐쳐와 어항과 어항에 깔리는 스톤들과 여름의 잎사귀들처럼 빛나고 매끄러운 것들을 좋아한다. 나는 바다를 좋아하지 않는다. 호수나 하천의 물빛들을 더 좋아한다. 매미, 새, 귀뚜라미 울음처럼 높은음들을 좋아한다. 내가 살아가는 공간이 반짝이고 투명하고 높은음들의 세계라고 믿는다. 반짝이고 투명한 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 세계가 깨끗하고 맑다고 느낀다.

서서히 좁아지는(월) 선명해서 섬뜩한(일) 빛들이 보고 싶은(요일)

날씨 : ☂

최근에 새벽운동을 나간 적이 있었다. 문학상 원고 마감을 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던 날이었다. 잠들기에는 늦어버린 시간이어서 운동을 나갔다. 하천에 가까워졌을 때쯤 새벽하늘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마치 오로라가 일렁이는 하늘 같아서 괜히 마음이 들떴다. 평소의 나는 보라색 하늘을 좋아하는데 지평선 끝에서 옅게 빛을 풀어내는 보라색 빛이 너무 아름다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강렬한 장면들은 쉽게 잊히지 않기 마련인데, 가끔은 너무 일상적이고 소소한 장면들이 오래도록 남을 때가 있는 것 같다.

새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던 날이었다. 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서 걷는데, 마치 아침을 향해 가는 걸음들이 모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늘 사진을 찍고 한참을 걷다가 길가에 핀 비비추를 발견했다. 새벽에 보는 꽃은 낮에 보는 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밤에 보는 꽃은 가끔 섬뜩한 느낌이 들 때도 있는데 새벽에 본 꽃은 고요한 느낌이었다. 희고 밝은 꽃잎이 선명했다. 새벽하늘과 꽃의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아서 일기에 여러 장의 사진을 첨부했다.

스무 살이 되고 친구들과 블로그를 만들었다. 매일 일기를 올리고 에세이를 종종 올리는 곳이다. 우리는 서로의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주기도 하고 서로의 일상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앞으로도 작지만 의미 있는 일상을 많이 기록하고 싶다. 글은 말보다 더 큰 힘을 지닌 것 같아서 앞으로도 쓰는 기쁨과 위로를 많이 받고 싶다. 물론 글이 지닌 힘이 커서 내가 썼던 일기를 되돌아볼 때마다 놀랄 때가 종종 있다. 비관적인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행복한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나는 읽는 일보다 쓰는 일에 더욱 즐거움을 느낀다. 특히 긴 글을 빠르게 쓰고 난 뒤의 쾌감을 좋아한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그 순간을 기억하는 ‘기억록’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글로 쓰는 순간 왜곡되어버리고, 후에 글을 다시 읽어도 그때의 기분을 온전히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 순간과 생각을 기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분명 의미 있다. 글을 쓰는 순간 자체가 나에게 기쁨이다. 나의 일기는 어떤 표가 될 때도 있고 시가 될 때도 있고 편지가 될 때가 있고 희곡이 될 때도 있다. 무슨 글이 나올지 몰라서 재미있다. 앞으로도 글을 통해 나의 ‘평정심’을 잃지 않고 나아가고 싶다. 가장 투명하고 솔직한 글이 일기라는 것을 앞으로도 굳게 믿고 싶다.

춤추고 싶은(월) 날개를 잃은 사람을 떠올리는(일) 모르는 소리가 들리는(요일)

날씨 : ☃

카스테라 만들기. 눈사람 만들기. 달고나 커피 만들기. 칼림바 연주하기. 떡볶이 만들기. 짜장 만들기. 오디 스무디 만들기. 지점토 조형물 만들기. 버섯 키우기. 월남쌈 만들기. 부채 만들기. 마들렌 만들기. 생일 케이크 만들기. 수채화 그리기. 김밥 만들기. 자화상 그리기, 나에게 편지쓰기. 나무 반지 만들기. 썬캐쳐 만들기. 갈대밭에 가기. 아크릴화 그리기. 르뱅쿠키 만들기. 미술관 가기. 봉숭아물 들이기. 박물관 가기. 딸기 소다 데려오기. 자전거 타고 산에 가기. 초코 슈크림 만들기. 과일젤리 만들기. 레몬 파운드 케이크 만들기. 마카롱 아이스크림 만들기. 영화 보기. 연극 보기.

숨차게 나열한 이것들은 올해 했던 취미생활들이다. 빼먹은 것들이 많을 것이고 남은 몇 달 동안 추가될 것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꿈이 많이 바뀌던 아이였다. 누구나 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는 종이접기, 마술, 과학실험, 논술, 미술, 바느질 같은 것들을 학교에서 배웠고 중학교 때는 베이킹, 타악기, 소설, 탁구, 영어회화, 줄넘기, 캘리그라피 같은 것들을 배웠다. 하고 싶은 일을 항상 가장 우선시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그래서 철이 없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고등학교 삼학년 때 선생님께서 나는 물질적인 안정보다 정신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인 것 같다고 말해주셨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정말 맞다고 속으로 여러 번 생각했다. 지금도 계속해서 하고 싶은 것들이 바뀌고 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는 대학교에 입학할 때쯤에 분명 문학 말고 다른 것을 배우고 싶어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예상은 적중했지만,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찾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계속 찾아 나갈 생각이다. 아직도 나는 철이 없는 인간이다. 순탄하게 지나오지 못했는데 점점 더 어려운 길을 택하고 있다. 나는 새로 나온 맛의 음료수 사 먹기를 좋아한다. 맛이 없을 때가 많지만 그것이 재미있다. 그러니까 새로운 일상을 믿고 싶다.

[부록] 문학소년의 책상과 소지품

날씨 : ?

[심지가 부러진 캔들] : 불이 붙지는 않지만 시트러스향이 좋음.

[왼손] : 어릴 적의 나는 왼손잡이였고 엄마는 억지로 고치려고 했음. 지금도 특정 도구를 사용할 때는 왼손이 편할 때가 많음. 왼손으로 글씨 쓰기 연습 중.

[텍스트] : 지중해 문명 자료조사.

[안경] : 임시.

[편지와 엽서] : 작은 쪽지부터 편지, 엽서까지 주렁주렁 매달려 있음.

[연필] : 개인적으로 연필 쓰기를 좋아함.

[시계] : 잘 사용하지는 않음.

[누렇게 바랠 정도로 오래된 책] : 엄마가 물려주신 책들이라서 소중함. 가끔 오래된 책에서 나는 눅눅한 냄새가 좋을 때가 있음.

[어항] : 딸기와 소다.

[코팅된 사진] : 고등학교 시절의 나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 열아홉 생일에 받았던 소중한 선물.

[먼지 쌓인 오르골] : 거의 켜지 않음.

[유리병 저금통] : 동전 모으기 좋아함. 동전 잘 모음. 동전을 모으려 일부러 현금을 쓴 적 다수 있음.

[망가진 다비드 조각상 모형] : 촛대를 사면서 많은 사은품. B급이라고 하셨지만 오브제로 쓰기 좋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