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1.

사랑하고 좋아하면서 미워하는 마음을 우리는 애증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분노하면서 연민을 느끼는 마음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주인공인 ‘나’는 분노와 연민의 감정을 ‘바틀비’를 통해 동시에 느낀다.

2.

소설의 인물은 크게 변호사인 ‘나’와 ‘나’가 고용한 세 명의 필경사, 그리고 한 명의 사동이다. 첫 번째로는 필경사 바틀비, 두 번째로 ‘야망과 소화 불량 때문에 신경질적이거나 무뚝뚝한’ 필경사 니퍼즈, 세 번째로 ‘아침에는 불그스름한 혈색 좋은 모습이었다가 점심시간인 정오를 지나면서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저녁쯤이 되면 차츰 사라지던’ 필경사 터키가 있다. 그러니까 오전에는 니퍼즈가 소화 불량으로 발작을 일으키고 오후에는 터키가 발작을 일으킨다. 마지막으로 사동인 진저넛은 사과나 쿠키 심부름을 한다. 인물의 이름들은 모두 별명이며, 소설 안에서 ‘나’가 바틀비의 ‘하지 않음’에 대한 비합리성을 인정받고자 질문하며 그들의 발작이 대사를 통해 두드러진다.

3.

소설의 간략한 줄거리는 법률 사무소의 변호사인 ‘나’가 바틀비를 고용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해, 바틀비의 태도 변화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나’의 인생 속에 아주 잠깐 들어왔던 바틀비라는 인물에 대한 짧은 이야기이다. ‘바틀비’의 태도만큼이나 소설의 줄거리는 단조롭게 흐르지만, ‘나’의 생각과 내면으로 소설이 거의 흘러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용의 흐름에 따라서 ‘나’의 심리가 계속해서 변화하고, 그 중심에는 ‘바틀비’라는 인물이 있다.

4.

핵심 인물인 ‘나’와 ‘바틀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비슷한 점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우선 ‘나’는 굉장히 ‘안정’과 ‘평탄한 삶이 최고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다. ‘나’는 ‘열띤 변론이나 대중의 갈채를 받은 적이 전혀 없는 야망 없는 변호사’이며, ‘조용하고 아늑한 사무실에서 주로 부자들의 채권, 저당 증서, 부동산 권리 증서 등을 다루는 편안한 일들’을 해왔다. 또한 ‘부정이나 폭력에 대해 분노하여 위험을 초래하는 일은 굉장히 자제하는 편’인 사람이다. 그것이 소설의 뒷부분에서 바틀비를 인간적으로 대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이성을 차리는 부분으로 이어진다. ‘나’는 소설의 초반에서 바틀비에게 긍정적인 느낌을 받고 바틀비를 자신의 곁에 두려 했다. 책상 또한 다른 필경사보다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마련해주었다. 그것이 바틀비의 조용하고 성실함이 ‘나’의 안정과 평탄을 추구하는 삶, 그리고 업무환경과 일부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바틀비’라는 인물은 소설의 앞부분을 통해서는 어떤 사람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사서(死書) 취급소의 말단 직원이었다는 정보 정도만 등장한다. 우선 바틀비는 굉장히 조용하고, 사실상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며, 매우 성실한 인물이었다. 또한 바틀비는 ‘필사’ 업무는 하지만 사무실의 관용 같았던 ‘필사를 검토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 ‘하지 않음’이 ‘나’를 당혹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바틀비에 대한 연민의 감정과 어떤 감동까지 만들고 있었다.

5.

소설에서 ‘하지 않는 쪽을 선호합니다.’라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바틀비의 대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때때로 ‘현재로선 하지 않는 쪽을 선호합니다.’ ‘아니요. 변화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현재로선 그 어떤 변화도 선호하지 않겠습니다.’와 같은 문장으로 말하거나, ‘않습니다’라는 부분에 힘을 주어 말하기도 하지만 바틀비의 태도는 매우 일관되게 등장하고 있었다. 그것이 소설 안에서 ‘유령’ ‘기둥’ ‘보초병’ 등으로 비유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 소설 안에서 어떻게 끼니를 해결하는지, 어떻게 잠을 자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빈 사무실 건물 계단에 얌전히 앉아 있거나, 감옥에 들어갔을 때 끼니를 거르고 차가운 돌에 누워있는 장면은 무척이나 ‘유령’처럼 보인다. 마치 ‘로봇’ 혹은 인간성을 상실한 인물의 모습 같기도 하다. 자유로운 개인시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바틀비의 ‘하지 않음’은 처음에 ‘필사를 검토하는 일’과 ‘우체국에 가는 일’ ‘잔심부름을 하는 일’ 등을 하지 않음에서 시작해서 후에는 필사조차 하지 않게 된다. ‘바틀비’에게는 일종의 신념과 자기주장과 고집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변화를 선호하지 않는’ 것 또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일자리를 계속 전전했던 까닭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바틀비는 사무실에서 의식주를 모두 해결했다. 그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바틀비의 경제적인 상황과 처지를 조금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바틀비는 ‘나’의 부탁과 해고와 도움을 모두 거부한다. 바틀비는 ‘하지 않음’을 계속 택하며 ‘유령’ ‘기둥’ ‘보초병’처럼 있었다. 급기야는 사무실이 이사를 갔을 때에도 남아 건물을 어슬렁거리기까지 한다. 언뜻 정신이상자 처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필경사 니퍼즈, 터키 또한 매일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킨다. 그것이 사무적인 업무와 답답함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설에서 바틀비의 ‘하지 않음’은 단순한 반복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처음에 바틀비는 갑작스럽게 ‘하지 않음’을 선고하듯 말하지만, 뒷부분에서는 ‘3일간의 숙고 끝에 그는 원래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대답’한다. 바틀비의 생각과 결정을 거의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바틀비는 필사를 하지 않고, 사무실을 떠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일 뿐이다.

6.

소설의 배경을 살펴보자면 ‘필경사’의 사전적인 정의는 서기, 혹은 서기관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있긴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필경사 바틀비의 업무 장소는 ‘법률 사무소’이다. 그리고 바틀비의 고용주인 ‘나’는 변호사이다. ‘법’과 관련된 ‘사무실’은 매우 딱딱하고 단조롭고 업무적으로 보이는데, 글씨를 베끼는 ‘필경사’ 또한 무척이나 사무적이다. 그리고 반복적이며, 자유롭기보다는 규율과 규칙, 그리고 정확성을 요구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또한 지금의 사무실들도 그렇지만 자리가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다는 점 또한 매우 삭막하게 느껴진다. 그런 배경들로 보았을 때 소설의 문체 또한 ‘나’의 시선에서 굉장히 단조롭게 흘러가고, 주관적이고도 객관적이다.

특히나 사무실의 구조 또한 ‘나’와 ‘바틀비’의 관계를 설명해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사무실의 한쪽 끝에는 ‘옥상까지 수직으로 천장이 나 있는 넓은 통풍로의 흰색 내벽’이 보인다. 그것이 생명력이 결여된 것 같은 매우 단조로운 느낌을 만들어낸다. ‘그에 비해 반대쪽은 비교적 다채로운’ 분위기이다. 무언가 결여되어 있고 어딘가 어두운 바틀비의 분위기와 연결된다.

7.

소설에서 ‘나’는 바틀비를 통해 굉장히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걱정’ ‘놀람’ ‘경악’ ‘어안이 벙벙함’ ‘흥분’ ‘적의’ ‘감동’ ‘가엾음’ ‘분노’ ‘충동’ ‘깊은 상념’ ‘맹목적 고집’ ‘기이함’ ‘불쾌’ ‘궁핍함’ ‘고독함’ ‘외로움’ ‘슬픔’ ‘오만함’ ‘연민’ ‘경멸’ ‘안쓰러움’ ‘먹먹함’ 등의 감정들이다. 이렇게 수많은 감정들은 ‘바틀비’라는 인물이 얼마나 특이한지, 또 ‘나’가 얼마나 고뇌를 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나’가 바틀비를 보며 분노했다가 이내 바틀비를 달래는 부분이 있었다. 아마 현실에서 바틀비처럼 행동했다면 당장 내쫓겼을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바틀비를 불쌍하고 안타깝게 대하는 ‘나’의 태도는 매우 인간적이다. ‘나’가 니퍼즈와 터키에게 물었을 때 ‘사무실에서 내쫓아야 한다’ ‘눈에 피멍이 들게 해야 한다’고 니퍼즈와 터키는 말한다. 그에 비해 ‘나’의 행동과 결정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하고 있었다. 또한 사무실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법조계에 돌기 시작했지만 ‘나’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바틀비를 인간적으로 대한다. ‘나’는 바틀비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괘씸하게 여기지만, 또 바틀비의 고독과 슬픔이 괘씸함을 덮게 만들고 있었다. 바틀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었던 ‘나’는 바틀비를 위해 최선의 선의를 베풀고 있었다. 마치 바틀비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다른 식으로 바틀비를 돕고 싶은 하나의 방식처럼 읽힌다. 그것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사식 요리사에게 바틀비를 부탁할 정도의 마음임을 짐작해보면, 바틀비의 고독과 슬픔 또한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할 수 있다. 마지막까지 ‘하지 않는 것을 선호’했던 바틀비의 말은 완전한 거부의 어조는 아니었다. 그냥 그것을 선호한다는 바틀비의 의견일 뿐이었다. 그런데 마치 바틀비의 기에 눌린 듯 바틀비를 존중하고 있었다. 자리를 지키고 떠나지 않는 바틀비의 모습이 하나의 비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8.

‘나는 그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닥에 떨어졌다.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벗어나길 갈망했던 그에게서 억지로 나 자신을 떼어 낸 채 떠났다.’

소설에서 ‘나’가 이사를 가면서 바틀비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부분이다. 아마도 돈이나 바틀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어떤 것을 준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바틀비에게서 ‘벗어나길 갈망’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바틀비에게 ‘극도로 불합리한 방식의 위협’을 당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나’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바틀비의 내면과 생각과 삶을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나’는 고용주로서 매우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수동적 저항만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하지만 저항하는 사람에게 악의가 전혀 없고 그 저항을 받아 내는 사람이 무자비한 이가 아니라면, 사람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정도의 한에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며 그런 저항을 이해하고자 애쓸 것이다.’

‘나’가 바틀비를 바라보는 관점을 설명한 부분이다. 바틀비의 행동에는 악의도, 어떤 감정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분노와 연민과 다양한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에게 느끼는 분노만큼 그를 화나게 만들고 싶은 묘한 충동’에 휩싸였다가도 ‘나’는 바틀비를 보며 슬퍼하고 안타까워한다.

9.

결국 소설을 ‘나’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할지, ‘바틀비’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할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라는 ‘나’의 외침으로 끝이 난다.

소설에서 ‘나’는 매우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태도로 바틀비를 대하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 문장은 바틀비를 떠올리는 탄식처럼 읽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하며 쓸쓸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소설에서 ‘나’는 바틀비를 두고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아픈 사람’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내면과 생각 또한 쉽게 알기 어려운 영역인데 ‘영혼’이 아픈 바틀비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